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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국(甘路國)또는 감문국(甘文國)은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일대이다. 이 지역은 삼국사기에 진한으로 표기되고 일찌감치 신라 영역에 편입되었다.

김천 지역에 삼한시대에 감문국(甘文國)이 있었으니, 그 속국으로는 지금의 조마면에 있었던 주조마국(走漕馬國), 어모면 중왕리 자리에 있는 어모국(禦侮國), 감 문면 문무리에 있었던 문무국(文武國), 아포면 제석리에 있었던 아포국 등이 있었다.

동사(東史)에 아포가 반란하자 감문국이 30명의 대군을 발병했다가 감천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감문국의 규모를 말해 주는 것이다. 감문국은 6~7백 가구의 작은 나라였음으로 짐작된다.

감문국은 원래 가야에 속해 있다가 거등왕 때에 6가야 연맹 체제가 무너지면서 신라가 지배권을 획득한 땅으로 판단된다. 거등왕 즉위 32년(신라 조분왕 원년) 서기231년 7월 가락국 군대가 신라 장수 석우노 (昔于老)와 합하여 감문국(甘文國)을 정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신성은 감문국 정벌의 중추성이였다.

조분 이사금 2년 이찬 우로(于老)로 하여금 감문국(甘文國)을 쳐서 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석우로내해왕의 아들로 포상팔국의 군대를 무찔렀고,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을 정벌하였고, 바람을 이용한 화공으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다. 후에 고구려군을 막다 실패하였다.

고대 변진 때는 감문소국 혹은 감로국이 위치하였던 곳을 신라 진흥왕 때 청주(靑州)로 고쳤고, 문무왕 때 감문군으로 고쳤다.

감문국은 추정 왕릉·토성 등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어 김천 역사·문화의 시발점이었다. 감문국의 읍성은 개령면 동부리에 있는 감문산성으로 추정되고 유산 북쪽 동월 곁에는 감문국 때 궁궐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감문국의 궁궐의 초석으로 전해져 내려온 돌이 양천리 유동산 북쪽 밑에 있는 민가에 1969년까지 있었다. 현재에는 실존하지 않는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마을 앞에 있는 ‘동부연당’을 향토 사학자들은 이 연못이 옛 감문국의 궁궐지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오봉 저수지, 갈항사터와 석조석가상의 고방사가 있는 김천시 금릉 빗내 농악이 전승되어 오고 있는 빗내 마을은 삼한시대 감문국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옛 감문국의 "나랏 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하여 동제(洞祭)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개령현의 북쪽 20리에는 삼성리 오성마을에는 감문국시대의 김효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고분이 있는데 지금은 말무덤으로 잘못 전해지고 있으며 개령면 서부리에서 신룡리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있는 폐탑 석편(지금은 복원되었음)이 있는 근처에는 감문국시대의 장부인릉으로 전해지는 고분이 있어 감문국이 이곳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 곤양의 원 이름이 곤미요, 개령 (開寧)의 원 이름이 감문국(甘文團)이니, 아마도 군미, 감로의 음(音)이 바핀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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